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라크 전쟁 (문단 편집) === 심각한 전후 처리 === 전후 처리도 아주 심각할 정도로 개판이었다. 자세한건 책 《그린존》[* 그린존(Green zone)은 바그다드 시내의 후세인 궁전 및 주변 지역의 안전 지대를 의미한다. 이 곳에 이라크 주둔군 사령부와 CPA 본부 등이 위치했다.](라지브 찬드라세카란 저, 북스토리)을 참고. 그 세계 최강 미국이 한 짓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고, 무엇보다도 이런 무식한 정책을 몇 년이나 밀고 나갔는데도 결실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에서 막장이었다. 한마디로 미국 내외의 전문가들이 [[청개구리|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것들만 골라서 했다]]. 이라크 전쟁 내내 그랬다. [[베트남 전쟁]] 당시 비효율의 극치였던 미군의 남베트남 정책과 해방정국[* 1945년 8월 15일 ~ 1948년 8월 14일.] 당시 한반도에서의 [[미군정]]마저도 이 따위는 아니었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전후 혼란스러운 이라크를 수습하는 역할을 맡았던 ORHA를 승계한 CPA 수장의 인사였다. CPA의 수장으로 등극한 [[폴 브리머]]는 제리라는 애칭이 있어서 제리 브리머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 유명한 [[헨리 키신저]] 밑에서 일했던 인물이었다. 폴 브리머는 자기만의 독선과 아집으로 이라크를 통치하려 했다. 그는 이슬람 문화에도 관심이 없었고 경제 문제도 몰랐다. 그럼에도 브리머는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이룩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문제는 그가 이라크 국민들을 바보로 여겼다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를 심어주겠다며 한 짓이 매우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이라 조직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사게 되었다. 또 이라크의 사회구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현실과는 동떨어진 정책을 수도 없이 내놓았다. 게다가 브리머는 국무부와 국방부, 심지어는 백악관까지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통치했다. 이라크군 해산, 바트당 축출같은 초대형 삽질을 벌일 때도 한 마디의 통보도 없어서 조지 부시 대통령을 포함한 미 수뇌부를 멘붕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어 가는데도 럼즈펠드는 가끔 자기 영역 침범할 때 종종 화를 내는 것 빼고는 브리머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을 꺼버렸고 백악관도 브리머의 행동을 딱히 문책하거나 해임하지도 않는 등 브리머의 막장행각을 내버려뒀다. 그리고 그 결과 이라크는 통치한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아 생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 막 나가는 인선: 전문가고 뭐고 민주당원이면 말할 것도 없고 온건 공화당원조차 공화당원답지 않다고 뽑지않았다. 조지 부시/공화당 충성도를 체크해 관료를 뽑아 보냈다. 그리고 이들은 주변에서 추천해주는 이라크에 관련된 논문이나 학술서, 전문가의 충고를 완전히 무시했다. 게다가 럼즈펠드의 국방부를 비롯한 네오콘들은 여기에 더해 자신들이 전후 이라크의 차기 지도자로 내정한 이라크 출신 망명자 아흐메드 찰라비를 지지하고 있었고 아흐메드 찰라비와 의견이 다르거나 그를 방해할 수 있다고 여겨진 인사들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자리에서 내쫓거나 협조를 취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정작 아흐메드 찰라비는 이라크 내에서 한때 '''요르단에서 은행 좀 경영해보다가 도망친 사람'''이라는 점 이외에는 정치인으로서 별로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던 데다가 이란과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미군과 척을 지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후세인 축출 직후에 과도정부 내각에 들어갔지만 이라크의 현실과 괴리된 정책을 남발하면서 딱히 유능하다는 인상을 남겨주지 못한 채 이라크 대중들에게 그냥 잊혀진 인물이 되고 말았다.그래도 이란이나 미국과의 연줄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말리키 총리가 IS의 발흥으로 퇴진한 후에 네오콘 진영과 이란에 의해서 총리직에 발탁될 뻔했지만 결국 하이다르 알 아바디 총리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총리가 되지 못했고, 2015년에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막 나가는 인선의 대상에는 대 이라크 전문가와 국무부 인사, 심지어 자신들이 임명한 이라크 담당 부서 직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게 이들은 네오콘들이 내정한 인사들이 앉기 전까지 잠시 맡는 [[바지사장]] 역할만 맡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이들이 전문가였고 네오콘들이 앉히려는 인물들은 공화당 충성도 테스트를 통과한 것 말고는 능력도 없었다. 그 결과로 맨 처음 이라크의 수습을 맡았던 제이 가너의 ORHA는, 한국으로 비유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 것도 없이 [[네이버 지식인]]에 의존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지경에 이르러야 했다. * 소수 정예를 통한 소규모 정밀 타격 전략과 그에 맞춰 동원된 병력은 이라크군을 성공적으로 무력화하는 시점까지는 별 문제 없었으나, 전투 종료 이후 혼란에 빠진 이라크의 치안을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규모였고 그 결과 전쟁 초기에 이라크에서 벌어진 폭동으로 주요 관공서들이 모조리 불타거나 도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들 자료들은 당연히 전후 이라크 재건에 필수적인 정보들이었고 ORHA는 국방부에게 이들 관공서를 지킬 병력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럼즈펠드는 씹었다. * 괴상한 정책: 예를 들어 실행되던 배급제를 완전 철폐하고 '충전식 현금 카드'를 배포하였다. 말만 들으면 전자화로 효율이 좋아질 게 아닌가 싶으나 이게 실행되던 2003년에서 2004년 당시, 이라크에는 현금 인출기나 카드 리더기가 아예 없었다. 카드고 뭐고 기계가 있어야 써먹을 수 있는 것. 덤으로 이라크의 전기·통신 체계도 낙후되고 전쟁통에 손상되어 엉망진창이었다. 이라크의 도시 한가운데만 나가봐도 현금 카드 사용은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었을 터, 카드 도입을 생각한 책임자는 이라크의 상황이 어떤지 최소한의 현장조사조차도 안해봤다는 것이다. 또한 당장 환자가 넘쳐나는 이라크 병원들에 의약품을 지원해주기는커녕 금연 캠페인에 열을 올렸다. 맥락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인데 진짜로 이런 흐름으로 일을 했다. 한 마디로 [[탁상행정|책임자라는 사람들이 철저한 책상물림 및 비전문가들 뿐이라 현실 감각이 전혀 없었던 것]]. 급기야 CPA의 이런 짓 때문에 골치를 썩던 미군들, 특히 민정대들(영어론 Civil Affairs Detachment)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CPA가 Can't Produce Anything(아무것도 못 만들어요)의 약자라고 비아냥거렸다. * 전쟁통에 이라크의 회계, 재정관련 서류들이 엄청나게 손실되었다. 당연히 국가를 안정시키려면 이런 판국에서도 남은 [[소하|서류를 긁어모으거나]] 생존자들의 증언을 어떡해서든 찾아야 한다. 그런데 계산하기 귀찮다고 '''이라크 국영기업들의 예금과 부채를 죄다 0으로 맞춰버렸다'''. 이건 [[국제법]] 위반 사항에, 부채가 쌓여가던 망하는 기업이 살아나고 예금이 쌓여가는 멀쩡한 기업이 망해버리는 파국을 불러왔다. 전후처리가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있는 일화이다. 기원전의 전쟁터에서도 [[한나라]]의 관료 소하는 [[진(영성)|진나라]] 수도 [[셴양시|함양]]에 입성하자마자 인구조사 문서를 비롯해 통치에 필요한 중요 문서를 챙기느라 바빴다. 그로부터 2천년이 훨씬 지난 시대의 전쟁터에서 이를 간과했다는 것은 CPA의 수준이 기원전 관료만도 못하다는 방증이다. * CPA에 부임하면서 입에 올린 자결권은 온데간데없이 이라크 총선거, 지방선거를 무효화하고 지도자를 지명하는 식으로 오히려 민주주의를 뿌리째 뽑는 일을 벌인다 그래서 내심 선거를 통해 영향력 확대를 기대하면서 미군을 환영하던 시아파의 지도자들마저 적으로 돌렸다. 물론 시아파 지도자들에 대한 대우 자체도 개판이었다. 이라크 시아파의 실질적인 수장인 아야톨라 올 오즈마와 협상할 때 미국 측에서 대표로 보낸 이는 어느 비뇨기과 의사였다. 이유는 그 의사의 아버지가 이라크 출신 이민자라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선거 자체도 불가능했던 것이, 수십년간의 바트당 독재 하에서 선거를 치러 본 적이 없어 선거명부 자체가 없었으며, 이를 대체할 인구조사 자료는 바그다드 약탈 당시 미군의 방관 하에 모든 기록이 불탔다. 이후에는 이라크의 극심한 혼란 때문에 인구조사 자체가 불가능했다.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들어왔던 셈. 게다가 CPA는 미군과도 제대로 협조체제가 구축되지 않아서 자신들이 하는 일에 조언을 구하거나 의견을 물어보거나, 혹은 이를 미리 통보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라크 군대를 해산시킬 때도, 알 사드르의 신문사를 폐쇄하고 심복들을 잡아가둘 때도 미군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 이 덕분에 영화 [[그린 존]]의 주인공이 이라크군의 알라위 장군을 찾아갔다가 빡돈 알라위와 그의 부하들에게 죽을 뻔했다. 물론 알라위는 미군이 나선다 쳐도 독재정권의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라 어차피 살려둘 수 없었고, 처단해야 할 자였다. 그 결과 CPA와 미군의 사이가 껄끄러워졌음은 물론 이라크 복구나 재건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온갖 국제분쟁에 개입한 경력이 있는 미군이니 만큼 전후 복구나 재건에 경험을 갖춘 이들이 여럿 있었으며 이들을 잘 활용하면 괜찮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CPA는 막무가내였다. * 전쟁 직후의 혼란통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이라크 경찰을 그대로 방치해두었고, 그 결과 2003~2004년 당시 9만 명 정도 됐던 이라크 경찰관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고 장비도 형편없었다. 한 예로 이라크의 한 경찰서에는 140명의 경찰관이 있었지만 소총은 10자루, 차량은 3대, 무전기는 딱 2대 있었다. 당연히 치안상태가 점차 나빠지다 온갖 범죄가 판을 치더니 급기야 2004년 중반부터는 이라크 각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도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반면 이들을 공격하는 반군은 농민들을 시켜 수입을 어느정도 나눠주는 조건으로 [[양귀비꽃]]을 재배케 하여 밀매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어 압도적인 무장과 화력으로 이라크 경찰을 공격했다. 게다가 미국을 몰아내려는 이라크 국민들의 여론 및 주변국의 대규모 지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특정 국가가 가진 저항 여력은 한계가 명백했지만 외부에서 계속 지원이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라크 경찰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경찰서는 심심하면 반군의 공격을 받아 일하던 경찰이 사망하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경찰들에게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장비의 수준이 반군들에 비해 한참을 밀리는 수준이라 암시장에서 본인의 자비를 들여 무장을 해야했다. 물론 그럼에도 경찰이 꾸준히 충원되긴 했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얘기했다.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0316135725|전후 복구 사업도 기업들에게 맡겨놨는데]] 사업을 따낸 기업이 하청을 주면서 일부를 떼먹고, 하청을 받은 업체가 다른 업체에 하청을, 그 업체가 또 다른 업체에 하청을 주는 식으로 그야말로 수십다리를 건너버렸다. 당연히 실적은 '0'에 가까웠다. 한 건설회사는 의료시설 142곳을 건설하기 위해 1억 8,600만 달러를 지급받았으나 완공된 것은 '''딸랑 6개 시설, 그것도 정상적인 이용조차 의심될 상태'''였다. 이런 범죄자 중 단지 일부만이 사기혐의로 [[버지니아 주]] 법원에서 소송을 당해 유죄 판결을 받고 1,000만 달러를 배상하라 했으나 우리는 미국 정부 소속이 아니라 연합군 임시행정처 소속이니 미국법에 따른 이 판결은 무효라 주장했는데 이게 진짜 법적으로 문제가 없어 재판에서도 먹혀들어갔다. 말 그대로 '''대의는 전혀 없고 장삿속만 잔뜩 있으니''' 이라크인들을 위할 만한 일을 해줄 리가 없다. * 이라크의 실질적인 치안을 담당하는 미군 병사들의 질적 수준이 점차 낮아졌다. 전쟁이 계속 길어지며 사상자는 날로 늘어나는데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평범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전쟁에 대한 염증이 시나브로 확산되었다. 당연히 군 지원자들도 점차 줄어들었고, 병력충원에 애를 먹게된 미군은 어쩔 수 없이 병사 선발 기준을 대폭 낮추게 된다. [[징병제]] 부활은 반전 여론과 민심을 의식한 정치권의 반대 때문에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이다.이러면서 [[정신이상자]], [[극우]], [[인종차별주의자]], 단순 [[범죄자]]에서 심지어 [[갱스터]] 등 군복무는 커녕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할지 의심스러운 사회부적응자들이 대거 군대로 유입되었다. 안그래도 미군은 언어/문화/종교가 다른 현지인들하고 잘 지내지 못하는 걸로 유명한데, 군인들의 수준이 하락하면서 온갖 엽기적인 사건사고가 폭발하였다. 의사소통조차 원활하지 않은 이라크인을 상대로 검문에 불응한다 싶으면 [[트리거 해피|일단 발포하는 미친 짓]]을 저지른 끝에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들이 무지막지하게 발생했다. 전쟁 스트레스에 찌들은 미군 병사들은 게릴라, 테러범들에 의해 아군 병사가 죽으면 다른 이라크인에게 화풀이하거나 그들의 가축에게 총을 쏴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단순한 화풀이나 복수를 넘어서 [[하타디 학살]]처럼 말 그대로 재미삼아서 사람을 학대하고 죽여버리는 등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였다. 2004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는 포로학대와 [[강간]] 사건까지 터졌다.[[http://www.gannett-cdn.com/-mm-/2c7103a9806a1b3e650e2fad7b1f40cde768aa89/c=0-0-480-640&r=537&c=0-0-534-712/local/-/media/2014/12/09/USATODAY/USATODAY/635537332065510263-ABU-GHRAIB.JPG|당시 사진]]. 미국이 중동에서 벌인 이런 행태들을 비꼰 게임인 [[스펙 옵스: 더 라인]]에서 [[:파일:Y35TrYFr.jpg|저 사진을 이용한 아트워크]]가 나온다.특히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학대를 저지른 미군 병사들은 이 사건으로 기소되었다해도 학대죄가 아닌 근무태만으로 기소된 데다 그것도 가벼운 형만 받고 나중엔 모두 풀려났다. 이외에도 미국이 아닌 영국인들이 벌인 짓이긴 하나,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자를 보면 이라크 전쟁 당시 [[영국군]] 병사들이 이유도 없이 이라크 소년을 때려죽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병사들은 즉각 구속되어 재판을 거쳐 수감되었는데, 법정에서 이들은 이 소년이 폭탄 테러를 저지를 것 같아 정당방어 차원에서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이들은 이라크 소년을 수십 분에 걸쳐 웃고 떠들며 때려죽였다고 한다. 살해당한 소년의 유족들에게는 보상금 명목으로 양 90마리가 지급되었다. 결국 이라크 사람들은 미국에 대한 증오가 쌓이다 곪아 터지기에 이르렀고 늦게서야 상황을 파악한 수뇌부가 병사들을 단속하고 처벌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정작 하타티 학살의 범인들은 '''2012년에 사실상 무죄방면 됐다'''. 이렇듯이 이라크인들의 분노는 돌이킬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른 것, 결국 치안유지는커녕 반란군만 폭증했다. 여기에 영어를 하지 못하는 불법이민자 청년들을 시민권을 조건으로 입대시키자 미군 병사들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문제까지 발생했다. * 이라크 현지 문화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통치 방식도 최악이었다. 모스크는 [[이슬람교]]의 '신전' 개념으로 당연히 경건하게 신발을 벗고 조용하게 입장해야 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입장 자체가 이슬람교도만 가능한 모스크도 있다. 그런데 미군 병사들이 마스지드([[모스크]])를 쳐들어가 강제 수색하는데 이는 반란군이 모스크에 숨어들어 공격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장소를 미군은 최소한의 예의는커녕, 무슨 적군 본거지 수색하는 것마냥 밀고 들어간 것이다. 당연히 현지인들의 분노는 커지기만 했다. 뭐만 하면 총을 갈겨 살해하고, 신분확인을 한답시고 [[니캅]]이나 [[차도르]] 차림의 여성들에게 강제로 얼굴을 내보이게 하여 여성들은 겁에 질려 울기까지 했으며 남자들은 격노하여 격하게 항의했으나 좋게 끝나봐야 무시이지 심하면 얻어맞고, 총으로 위협받거나 사살당하기만 했다. 이스라엘과 인도가 팔레스타인과 카슈미르 주민들을 대하는 게 이와 비슷하다. 이슬람 문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수십 년을 교류한 혈맹조차 하루아침에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 최악의 행위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집에 타인을 가급적 들이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슬람을 떠나서 어떤 문화권에서도 웬 총 든 군인이 자기 집 문을 와장창 부수고 들어와 테러범이 있는 게 아니냐며 윽박지르는 게 용인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거기다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나라에서 여성들의 얼굴을 억지로 들추며 희롱하는 행위까지 아무렇지 않게 해댔으니 분노가 폭발할 수밖에 없다. 결국 현지인들을 완벽하게 적으로 돌리고 나서야 자기들이 사고쳤다고 깨달은 수뇌부가 수색은 정중하게 행하고, 모스크에는 현지인으로 구성된 이라크군이나 경찰만 들여보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미 늦었다. [[SBS]] 뉴스 PD인 김영미는 2004년 이라크를 가서 현지 취재를 하며 저항세력까지 만나 인터뷰했다. (미국에게 자료 넘기지 말고 복면하고 그 자료를 자기에게 줘서 확인하게끔 하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이렇게 미국이 적대적으로 돌린 현지인들 중에는 후세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처음에는 미군을 환영했지만 저지르는 갖은 무례와 만행에 놀라 반군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김영미 PD는 저항세력에 이어 미군 병사들 상대로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이 병사들은 우리가 이라크에 자유를 찾아주고, 지원도 해주니 당연히 이라크인들은 고마워해야 한다는 식의 사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전형적인 식민제국주의적인 발상으로, 반제국주의자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 더구나 이때는 전쟁 초기였다. 나중으로 갈수록 미군 병사들의 질적 수준이 마구 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중에는 어떤 정도였는지 대략 감이 온다. 황당해진 취재진이 당신네들 집에 누가 처들어와서 들쑤시고 돌아다니고 돈을 던져줘도 좋겠냐고 묻자 병사들이 뭐라 반박하지 않고 그냥 인터뷰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미군은 수렁 속으로 알아서 들어간 셈이었다. * 그린존 내에서 일하는 이라크인 관료 및 통역사 등에 대한 문화적 배려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한 예로 그린존 내의 식당들은 미국인들이 '마치 고향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베이컨, 핫도그, 폭찹 등의 돼지고기가 들어간 [[미국 요리]]들을 제공했다. 문제는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이라크인 직원들도 이걸 먹어야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라크 직원들은 욕을 퍼부으며 안 먹고 나가버렸고 그린존 내 군목 직업을 때려치기 일쑤였다. 그나마 상식이 있던 몇몇 미국 관료들은 개인적으로 따로 이라크인 직원들을 불러내어서 이라크 현지식을 대접하고, 주기적으로 날을 정해서 가끔이라도 양고기나 쇠고기, 닭고기가 들어간 이슬람식 요리를 제공하자고 상부에 건의했다. 하지만 무슬림들에게 [[돼지고기]]가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던 상부는 이를 무시했다. 참고로 그린존의 식당에서는 '[[프렌치 프라이]]' 대신 '프리덤 프라이'가 있었다.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이라크 전을 공개 비판했다는 이유로''' 바꾼 것이다. 이때 프랑스 정부 대변인은 어차피 프렌치 프라이는 벨기에가 원산지라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큰 프랑스 국민들에게 욕을 먹었던 일화가 있다. 물론 미국의 '프리덤 프라이'는 몇 해 안가 슬쩍 프렌치 프라이로 이름이 돌아왔다. * 이라크의 박물관과 문화재도 피해를 입었는데,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 [[이라크 박물관]]에서 직원들이 철수한 이후 미군들이 경비를 다시 맡아 일주일 동안 박물관에 배치되었는데 이미 약탈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상태였고 심지어는 약탈자 중에 다수의 미군들도 있었다. 결국 무려 '''15,000점'''이 넘는 유물들이 약탈당했고 미군들 중 일부는 자신이 약탈한 문화재를 밀반출하다가 미국 세관에 걸리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https://www.rt.com/op-ed/iraq-war-cultural-artifacts-553/amp/|링크]] 그나마 다행히도 2021년 8월에 미국이 약탈해 갔던 유물 상당수를 이라크에 반환했다. 물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유물들도 꽤 있긴 하지만. * 아주 조금의 [[아랍어]]도 모르는 병사들이 가득한데, 미군은 어설픈 통역조차 제대로 고용하지 않았다. 김영미 PD가 취재한 내용을 보면 이런 일화도 있다. 이라크인 부모와 아이 3명이 차를 타고 가던 중 미군 병사들이 검문을 위해 멈추게 했다. 이때 미군 병사들은 아랍어로 '뒤'라는 뜻의 말만 내뱉었다. 차를 타고 있던 이라크 사람은 당연히 차를 후진시키라는 소리인줄 알고 차를 후진했는데 미군이 다짜고짜 총격을 가해 차에 탑승한 일가족 모두가 몰살당했다. 알고보니, '뒤' 소리를 연발한 미군은 차량 뒤쪽의 트렁크를 열어라 라는 뜻에서 '뒤'라고 말한 것이었다. 살해당한 가족들의 친척, 이웃들은 격분하여 이 학살자들을 비난하고 처벌을 요구했으나 미군 기지로 몰린 수십여 명의 시위군중을 상대로 미군은 경고사격을 가했다. 결국 며칠 안가 분노한 사람들이 기지를 마구 공격하고 인근 지역 사람들이 통역이고 뭐고 미군에게 그 어떠한 협조도 하지 않아 미군은 낭패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더불어 취재진이 다른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니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고 한다. 미군 고위 관계자들에게 이 일화를 말해주자 그들도 당황해하면서 대충 영어만 통하거나 어찌 고용하면 될지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고 자신들의 준비 소홀을 인정했다. * 병력부족도 심각했다. CPA는 그린존 안에서만 상황을 보고 있었지만 이라크 전체의 상황은 안전한 그린존과는 180도 달랐다. 특히 미군의 경우 병력 부족이 너무나 심각했는데 원래 이라크전을 하기 전에 공격병력의 경우 최소 2개 기갑사단이 필요했고, 점령 후 통제 안정화에서만 40만 병력 소요가 예상되던 상황이었다. 각종 악재조건을 고려했을 때 이라크 전체의 안정화 작전에 필요한 미군 지상군 병력이 40만이라는 것이 이전부터 미국 내 전문가들을 통해 제기되었지만 럼즈펠드는 무시했다. 이로 인해 미군은 부족한 병력으로 치안유지를 해야했고 지원을 할만한 동맹군들도 그들이 원하는 수요의 병력을 보내지를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동맹군들을 지원받는 데에도 여러가지 논란이 휩싸였다. 게다가 이라크 군경은 미군을 보조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병력부족은 심각했고 그 덕을 대량으로 본 게 바로 PMC들이었다. * 영화 [[그린 존]]에서도 나오지만 이라크의 원래 기반 인력들을 초반부터 원큐에 날려버리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미국 정부는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 바트당 사람들을 전혀 몰랐고 폴 브리머 군정장관이 탈바트당화라는 명분에 집착해 사방의 경고를 씹더니 바트당 관료 축출-이라크 군대 해산이라는 엄청난 짓을 저질러버렸다. 이 미친 짓거리는 이라크군을 확보해 부족한 치안유지병력을 확보하려 했던 국무부와 국방부는 물론 백악관의 부시 대통령까지 멘탈을 붕괴시켜버린 엄청난 삽질이었다. 덕분에 기존의 바트당 온건파[* 이들 중에는 이라크를 이끌어가야 할 엘리트들도 많았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상이군인으로서 당원증을 보상으로 받았을 뿐인 애먼 사람들도 있었다.]나 미국의 협조를 주장했던 세력은 완전히 몰락했다. 이라크 육군, 해군, 공군, 정보부 등을 무조건 해고하면서 기존의 이라크군 병력이 게릴라로 돌변하고 싸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마디로 정치적인 적과 군사적인 적을 대량으로 만들지 못해서 안달을 한 격이다. 적을 못 만들어서 안달하는 정책을 남발하면서 게릴라들을 대량으로 만들었던 데다가 나중에야 그 조치를 단계적으로 풀었지만 수니파나 바트당 등의 일원들은 미국을 믿지 않았다. 이런 혼란에 대해 럼즈펠드는 "자유는 원래 어수선한거에요.' 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서 굴욕적으로 물러났을때 "어수선한 자유가 이렇게 오래 갈 지 아셨습니까?" 라고 비아냥거리듯이 질문하는 기자들을 피해 다니며 입을 다물었다. * 바트당을 소멸시키며 수니파를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린 상황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시아파와도 협조하지 않았고, 결국 시아파와 전혀 협의나 공조 등이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국가 지도층에 앉혀 침략자 미국에 분노하는 수니파 민중 + 공조도 안 되고 말도 안통하는 노답 시아파 근본주의자 국가 수뇌부라는 절망적인 구도를 만들어놨다. 점령을 제대로 하려면 잠재적 저항세력을 몇가지 부류로 나눈 뒤 한 쪽을 포용하는 divide & rule이 제국주의 시절 식민통치의 방식이었는데 나누기만 해놓고 통치는 못한 셈. 국가지도층과 민중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된 상황에서 한 쪽을 끌어들이지도 못하고 양 쪽 모두 적이 된 상황이다. 물론 이라크 정부는 겉으로는 친미를 표방했지만 이 시기 미국과 이라크 관계는 오늘날 중국과 북한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시아파 종교 지도자인 알 시스타니와 폴 브리머 사이에는 전혀 교류가 이어지 않았고 초기 정권이양을 가지고 싸웠으며, 이는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 바트당 축출 또한 철저하지 못했다. 이라크의 핵심 공업도시 중 하나였던 팔루자는 열혈 바트당 지지세력으로, 우리나라 민주의 광주나 보수의 대구와 1:1, 아니 그 이상으로 대응되는 도시다. 바그다드 못지않게 중요한 도시였으나 수도 점령만을 우선시한 미군은 이 지점까지 아예 오지도 않았으며, 이라크군이 해산되면서 팔루자의 무기와 공업생산력은 알카에다와 저항세력의 손에 고스란히 떨어졌다. 이후 2003년 4월까진 사실상 저항세력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4월 이후에는 대놓고 중앙정부의 지시에 반항하며 곳곳에서 저항활동이 벌어졌다. 이 저항은 2004년 4월까지 이어졌는데, 이 모든 사태의 정점은 "팔루자를 제압한 미국이 저항세력을 해산시키기는커녕, 팔루자 여단이라는 이름 아래 저항세력을 공인하고 팔루자의 실질적인 통치를 맡겼으며 무기까지 제공한 것"이다. 이 팔루자 여단은 사실상 알카에다 하수세력이었으며 7개월 뒤 2차 팔루자 전투로 와해되기 전까지 수많은 전사와 무기를 여러 은거지로 빼돌렸다. 더불어 2차 팔루자 전투는 팔루자를 거의 밀어버리다시피 했기 때문에 1차 때 그냥 민간인 희생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이 중론이다. * 예로부터 타국을 점령하려면 우선 그 주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치 독일도 [[독소전쟁|소련을 침공하고 주민 신뢰 획을 무시하다 큰 코를 다쳤다]]. 사실 나치들도 전쟁을 수행하던 수뇌부는 (특히 러시아의 피지배민족 지역에서) 독일군을 해방군 이미지로 만들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했지만 현장지휘관들과 [[아돌프 히틀러|그 총통]]의 삽질로 말아먹었다. 침공국 입장에서 가볍게 짓눌러 버릴 수 있는 완전 소국이거나 그게 아니라도 외부 지원 루트를 완전히 차단가능한 곳이 아닌 다음에야 현지인의 긍정적인 여론을 만드는 건 변함없는 법칙으로 역사에서 이미 여러 번 증명되었다. 게다가 소국이라고 하더라도 과거와는 달리 현대에는 해당 소국의 가정 내에서 대규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 무기를 제조하거나 테러를 일으키는 방식의 공격이 가능해다. 그러므로 침공국이 제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해당 국가의 국민들을 철저히 학살할 생각이 있지 않고서야 완전한 점령은 매우 어렵다. 또한, 만약 그렇게 학살을 자행한다 하더라도 민주주의 국가일 경우 다음 대선은 사실상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고,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더라도 국제적 비난을 피할 수 없으니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간에 주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길이다. 때문에 미국의 바로 옆나라도 아니고 중동까지 원정온 소수의 미 원정군이 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자 유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점령 방식은 민사 작전으로 이라크인들의 신뢰를 얻으면서 후세인 잔당과 이라크인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형편없는 전후처리와 통치 방식을 남발한 미국은 이라크를 제어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렸다. 사담 후세인 때보다도 훨씬 상황이 안 좋아진 것이, 이제 이라크에는 국민감정상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 실제로 이 꼴을 보고 [[이란]] 망명자들은 한 목소리로 이란에 대한 미국의 군사 공격에 결사 반대하게 된다. 미국이 이란에 쳐들어가서 이라크 VER 2.0을 연출할 것이 뻔한데, 그럼 이란인들은 당장 신정체제에 합류하여 다 같이 미국에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란은 인구 수로는 이라크의 2배가 넘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훨씬 넓은 땅에 그나마 시아파 아랍 인이나 쿠르드족 출신 한정으로나마 [[사담 후세인]] 정권을 축출시켜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기라도 하는 이라크 인들과 다르다. 이란은 현 이슬람 신정체제의 수뇌부들을 비롯해 세속/공화주의 성향의 이란내 반체제 세력들조차도 미국이 [[팔레비 왕조]]의 폭정을 지원해준 것에 대한 반감이 크다. 심지어 이들은 이란 혁명 당시 이슬람주의 세력들과 손을 잡고 팔레비 왕조의 왕정폐지를 주도했다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에게 주도권 싸움에서 밀려난 바 있다. 때문에 이란은 이라크처럼 내분에 의한 내전보다는 미국 주도의 서방군대와 미국이 세운 친미 이란 정부에 대하여 힘을 합쳐 더 맹렬하게 공격할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 최악의 방법으로 이라크 점령 후 외교나 전후 평화에 신경쓰지 않고 자원을 빨아먹었다면 깡패국가라고 욕을 먹었을지언정 자국의 이득이 조금이라도 남았겠지만, 이런 생각마저도 하지 않고 이라크를 부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또 이 경우는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만들 위험이 엄청나게 높았다. 특히 이슬람국가는 미국에게 어떤 테러를 벌일지 알 수 없다. 그 결과 중국은 중동-아프리카 자원 외교를 통해 미국이 망쳐놓은 판도에서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었고, 이후 미국 정부는 중국의 성장세를 눈뜨고 지켜보면서 경쟁에 들어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